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3세 (문단 편집) == 평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나폴레옹 3세|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 >---- >작가 [[빅토르 위고]]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무리의 병정들에 둘러싸여 있던 1804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꼬마 하사관]] 다음에는 한 무리의 부르주아지에게 둘러싸인 '''[[나폴레옹 3세|1851년의 콧수염쟁이.]]''' >----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 그는 [[보나파르트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실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치세는 근대적 독재자의 선례를 만들었다.[* [[굽시니스트]]는 [[시사인]] 만화에서 전두환의 [[5.17 내란]]을 루이 나폴레옹식 쿠데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유신정권]]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과 서울시 건설 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내치 정책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초의 근대적 독재자'''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큰아버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수많은 전공과 치적을 이루며 황제로서의 위업을 세웠다면, 나폴레옹 3세는 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하고 국민투표란 정치적 수단을 강요했다. 지식인과 급진 사상가들에게 이는 치욕적인 일이기에[* 대표적으로 빅토르 위고.] 반대하는 소요를 일으켰으나, 나폴레옹 3세에게 손쉽게 진압당했다. 1852년 ~ 1870년 사이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를 본받아 외치에 신경을 기울여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샤르데냐 왕국을 도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보이와 니스를 얻었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양보를 얻어냈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청나라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 진출해 프랑스의 위력을 외견상으로 보였으며 비록 큰 실패로 끝났지만 멕시코 원정도 시도했다. 국내에서도 시운의 상승을 맛봤는데,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결과 프랑스의 경제활동이 자극되어 성장세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번영, 자신감,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소규모 자영농과 가톨릭, 기업가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어 세력을 넓혔고, 수도 파리를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수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파리를 다시금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권위주의와 개인의 매력에 의한 성과였을 뿐, 강력한 체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860년에 프랑스 노동자들은 영국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방법을 배워와 국내 노동운동 활성화를 일으켰고, 이는 기업가들이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1860년대에는 황제의 추문이 폭로되어 인기를 떨어뜨렸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864년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부여하고, 1868년 노동조합 조직을 허락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선거에서 반 나폴레옹계 의원들이 진출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도발이 터지자 전쟁을 감행한 나폴레옹 3세는 패배해 폐위되었다.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외교에서는 실패했던 나폴레옹 1세와 정반대로, 나폴레옹 3세는 외교와 정치적인 감각은 괜찮았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끔찍함 그 자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